[그 시절 영화] 천년학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의 여운 [그 시절 영화] 천년학.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가슴속에 맺힌 뜨거운 그 무엇이 바로 한(恨)이 아닐까.
Beyond the Years, 감독 임권택, 출연 오정해, 조재현, 임진택, 2007.

한국 영화의 전설, 임권택 감독의 명작 <천년학>

‘서편제’의 감동을 잇는 또 하나의 걸작

벌써 15년이 흘렀을까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가 판소리의 매력으로 온 국민을 사로잡았던 때가 떠오릅니다. 당시 ‘우리 소리’의 진수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이게 우리 것이여!’라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한국 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임권택 감독이 그의 100번째 작품으로 <천년학>(2007)을 선보였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전작의 영광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과 깊이로 우리의 전통과 정서를 다시금 울려 퍼지게 합니다.

남도의 정취를 담은 감각적인 영상미

<천년학>은 남도의 아름다운 산수와 애절한 판소리 가락, 그리고 남매 간의 애틋한 정서를 통해 전통적 한국 정서를 가장 고유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특히 영화 제목 ‘천년학’은 학의 장수처럼 영원히 남을 우리의 소리와 정서를 상징하며,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만들고자 한 임 감독의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서편제’와 닮은 듯 다른 이야기

많은 이들이 <서편제>를 기억하며 <천년학>의 줄거리가 새롭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영화 감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천년학>은 <서편제>에서 이어받은 서사를 변주하여, 남매의 애틋한 사랑과 그들의 여정을 한국적인 감성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영화 속 남매는 서로를 그리워하며 애타게 찾지만, 만나서는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절제된 감정 표현은 현대의 즉물적이고 단순한 사랑과 대비되며, 깊은 울림을 줍니다.

캐릭터의 변화로 깊어진 서사

<천년학>에서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설정이 전작과 달라졌습니다. 소리꾼 아버지 유봉은 전작의 괴팍한 성격에서 편안하고 수더분한 인물로 변하며 그의 비중이 줄어들었습니다. 동생 동호는 중심 인물로 격상되어 이야기를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여주인공 송화는 더욱 성숙해진 모습으로 관객에게 안정감을 선사하며, 그녀의 창(唱)은 여전히 청아하고 애절합니다.

아름다움과 슬픔의 정서, 그리고 한(恨)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안타까움의 정서를 밑바탕으로 한 인물들의 서사입니다. 주인공 동호와 송화뿐만 아니라 득음을 이루지 못한 유봉,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은 용택, 동호를 끝내 얻지 못한 단심 등 모든 인물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아쉬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렇듯 <천년학>은 한(恨)을 이야기합니다. 풀리지 않는 응어리와 그로 인한 슬픔을 인고와 절제로 표현하며, 관객의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듭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깊은 비극을 전달하는 임권택 감독의 관록은 관객에게 긴 여운을 남깁니다.

영상미와 감동이 절정에 이르는 명장면들

<천년학>의 영상미는 단연 압권입니다. 제주도의 고운 산과 들에서 “갈까부다”를 부르는 장면, 매화꽃이 눈처럼 날리는 가운데 “꿈이로다”를 노래하는 장면 등은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동호가 누이의 북을 두드리며 환영과 마주하는 순간은 관객의 가슴에 깊이 새겨질 명장면입니다.

임권택 감독의 장인 정신에 박수를

<천년학>은 <서편제>와 같은 이야기 같으면서도 다른 이야기, 그리고 다른 이야기 같으면서도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한 장면, 한 대사마다 임 감독의 연륜과 내공, 피와 땀이 배어 있습니다. 같은 재료로도 새롭고 감동적인 작품을 완성한 그의 장인정신과 열정에 뜨거운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천년학>은 우리 전통의 미와 정서를 세계에 알리며, 한국 영화사의 새로운 획을 그은 작품입니다. 아름답고도 슬픈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