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영화]1987

[그 시절 영화]1987. 그때 너는 무엇을 했느냐? 그날 같은 거 안 와요. 꿈꾸지 말고 정신 차리세요.

1987 : When the Day Comes, 감독 장준환, 출연 하정우, 김윤석, 강동원, 김태리, 2017.

영화 <1987>

교련복 제식훈련 시절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던 철권통치 시절에 대학을 다닌 나는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켕기곤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재정권을 향해 고함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주먹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한 채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부끄러움이다.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고 국가가 시키는 대로 제식훈련을 하고 총검술을 배웠으며, 그 햇수만큼 군 복무 기간을 단축 받은 것만 감지덕지했으니, 그런 청맹과니가 없었다. 난데없는 총성으로 유신독재가 막을 내린 후 민주화를 외치며 화염병을 던지는 후배들을 보면서 비로소 깨달음이 왔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역사의식이 없이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뉘우침,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에 나선 뜨거웠던 시절의 순결한 영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따가워진다.

장준환 감독의 1987

장준환 감독이 연출한 <1987>(2017)은 한동안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었던 나의 부끄러움을 바늘로 찔러댔다. 영화는 정확히 한 세대, 서른 해 전의 어지러운 국내 상황을 재현해낸다. 장갑차로 정권을 가로챈 독재자가 정권 연장의 야욕을 드러내고, 피 끓는 대학생들은 교정에서 뛰쳐나와 거리를 누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시가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경찰들은 시위 주동자 검거에 열을 올린다. 그리하여 어떤 학생은 고문을 받다 숨지고 어떤 학생은 최루탄에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화는 한 대학생의 고문치사 사건을 놓고 그것을 덮으려는 경찰세력과 그것을 파헤쳐서 세상에 알리려는 사람들의 모습들의 밀고 당김을 보여준다. 경찰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시신을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하려 하자, 어느 소신 있는 검사가 그에 불응하고 부검을 통해 물고문으로 인한 질식사임을 밝혀내고,

결국 그 사실은 기자를 통해 언론에 공개된다. 총칼로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으려고 눈이 벌겠던 야만의 시절에 진실과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긴박하기 짝이 없다.

1987년의 군상

<1987>은 당시의 군상들을 잇달아 비춰준다. 정권의 입맛대로 폭력으로 모든 것을 눌러 대는 경찰 간부와 “받들겠습니다!”라며 지시를 따르는 하수인들, 원칙을 지키려는 검사와 진실을 파헤치는 신문기자, 경찰에 쫓기는 민주인사와 비밀리에 그들을 돕는 민초들, 백골단의 무차별 폭력과 최루탄, 고문을 받다 죽은 자식의 재를 강에 뿌리는 아버지, 동아리 활동을 가장하여 광주항쟁 영상물을 숨죽여 시청하는 대학생 등 그 시대의 여러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여자대학생 연희의 의식변화이다. 구멍가게의 딸인 그는 학생운동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교도관인 삼촌이 민주인사에게 전해달라는 편지 심부름에도 짜증을 내고, 동아리에서 만난 남학생이 시위에 나서는 것도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왜 그렇게 다들 잘났어. 가족들 생각은 안 해요? 그날 같은 거 안 와요. 꿈꾸지 말고 정신 차리세요.” 하며 못마땅해한다.

그러다 삼촌의 석방을 외치는 엄마를 찾으러 남영동에 갔다가 경찰에 끌려가면서 비로소 현실에 눈을 뜬다. 마침내 동아리의 남학생이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신문 보도를 보고는 그는 시청광장으로 달려가 “호헌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대의 버스에 올라선다. 평범한 여학생이 시대 상황을 깨닫고 새로운 인물로 변모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 민중들의 현실 대응 양상을 보여준다.

그 날이 오면

이 영화의 마지막에 흐르는 <그날이 오면>(1989) 또한 큰 울림을 준다. 나는 예전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곡을 들었지만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와 함께 노래를 접하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느 노래가 이처럼 영화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목숨을 걸고 어둠에 맞서던 젊은이들의 ‘그날’에 대한 소망이 절절히 스며있는 노래다. 고통을 참고 견디며 밝은 날이 오기를 염원하는 간절함이 가슴에 사무친다. 과연 피 흘리며 싸우던 그들이 꾸던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은 결코 ‘한밤의 꿈’도 ‘헛된 꿈’도 아니었다.

마침내 독재자는 정권 연장의 음험함 욕심을 거두고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함으로써 국민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때의 ‘뜨거운 눈물’은 서른 해가 지난 뒤에 무능한 대통령을 탄핵한 촛불혁명의 ‘그날’로도 꽃을 피웠던 것이 아니겠는가.

너는 무엇을 했는냐

영화 <1987>은 나에게 준엄한 질문을 던진다. 젊은이들이 목숨을 내놓고 맹렬히 싸우던 시절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나는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학생이 아니고 사회인이라는 핑계로 어지러운 정국을 팔짱을 끼고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음속으로야 어찌 청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군부독재에 종식을 바라지 않았으랴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지러운 시절을 용케 피해온 것은 행운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빚일 뿐이다. 영화 <1987>을 보는 시간은 아물지 않은 부끄러움을 콕콕 찔러대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