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영화] 시(詩)

순결한 영혼의 누님께.
누님이 몸을 던져 쓴 그 시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입니다.

Poetry, 감독 이창동, 출연 윤정희, 이다윗, 김희라, 2010.

시(詩)

누님이라고 부를게요

당신은 우리 누나를 많이 닮았어요. 아니 우리 누나가 당신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요? 당신은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지만 열다섯 살 소녀 같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어요. 우리 누나도 당신처럼 그렇게 착하고 여리고 순수한 부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당신의 표정이며 행동거지를 보며 우리 누나를 떠올렸지요.

시를 배우는 누님, 그리하여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쓰고 싶어 하는 누님, 유난히 꽃을 예뻐하고 호기심이 많은 누님, 땅에 떨어진 살구 열매 하나에도 감탄하는 누님, 예쁜 모자에 화사한 옷을 갖춰 입고 공주처럼 살아가고 싶은 누님,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마음만큼은 넉넉한 누님, 당신이 그렇게 아름다움 속에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냉정하고 험상궂지요. 폭군처럼 늘 위협을 해대지요. 그 앞에 선 누님은 바람 앞의 등잔불처럼 나약하기만 합니다. 누님을 낭만 소녀로 살아가도록 놓아두지 않는 세상이 참으로 밉습니다.

냉혹한 현실 앞의 누님

누님은 이혼한 딸이 맡겨놓은 손자 하나를 데리고 살지요. 그리고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노인을 보살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또 틈틈이 문화원에 다니며 시 창작 강의도 듣고 있지요. 시상을 얻기 위해 사과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수첩에다 꼼꼼히 기록도 하고 아주 열심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누님을 정신 나갔다고 할지 몰라도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요. 시인의 길도 제대로 걷고 있다고 봐요.

하기야 가끔 건망증 기미를 보이는 누님은 병원에서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분이기는 해요. 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이에 비해 심한 정도는 아닙니다.

시상을 얻으려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느낌을 수첩에 적는 것이나, 요양 보호를 해주는 할아버지가 엉뚱한 요구해올 때 기막혀하는 것을 봐도 누님은 아직 다행스러운 편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어느 날 학부모에게 들은 끔찍한 소식, 중학생 패거리들이 또래 여학생을 성폭행했는데, 거기에 누님 손자가 가담했다지 않아요.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여학생이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합의와 누님의 선택

가해 학생 여섯 명의 학부모가 모여 대책을 논의하지요. 그리고 각각 5백만 원씩 돈을 내어 여학생의 부모와 합의를 합니다. 그런데 누님에게 그런 큰돈이 어디 있겠어요. 결국, 고민 끝에 요양 보호 할아버지의 요구를 들어주고 합의금을 마련하지요. 그렇게 하여 사건은 일단락되었지요.

그렇지만 그게 끝이 아니지요. 누님은 그것으로 사건을 잊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한 소녀가 꽃다운 목숨을 버린 일인데 어떻게 돈 몇백만 원으로 손을 털고 돌아설 수 있겠어요. 누님의 가슴에는 아직도 개운치 않은 것이 남아있었지요. 소녀에 대한 죄책감이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소녀를 죽게 한 윤리적 책임은 누군가가 져야 한다는 생각이었을까요. 누님은 손자에게 “왜 그랬어?” 하고 책망도 해보고, 소녀가 몸을 던진 강변에도 가보고, 소녀를 추도하는 성당의 미사에도, 피해 장소였던 학교의 실험실에도 찾아가 보지요. 나중에는 소녀의 집에까지 찾아가 그 엄마를 만나기도 합니다.

완성된 시(詩)

그러다 마침내 시 한 편을 완성하지요.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로 시작하는 내용은 죽은 소녀에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이어지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도 작별할 시간”이라는 구절을 보면 누님의 어떤 마음가짐을 읽을 수가 있어요.

누님은 시를 읊조리며 들길을 걷지요. 그러다 누님의 목소리는 앳된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지요. 누님의 모습 또한 교복 입은 소녀로 바뀝니다.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시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아마 소녀와의 새로운 만남을 소망하는 듯합니다. 길을 걷던 소녀는 마침내 강물이 흐르는 다리의 난간에 이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다음 장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거기서 막이 내리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누님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가엾은 누님, 왜 그랬어요? 살짝 고개를 돌려버리고 모른척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했어요? 티 없이 맑은 영혼을 지닌 누님에게는 세상이 너무나 속되었던가요? 세상을 견디는 일이 그리도 힘겨웠던가요? 너무도 안쓰러운 마음에 북받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누님의 마지막 소망

서글픈 사람, 누님이야말로 이 세상 누구보다도 순결한 사람입니다. 누님이 남긴 한 편의 시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러고 보니 누님은 결국 목표를 이루었네요. 멋진 시 한 편을 쓰고 싶다고 했잖아요. 시란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라고 문화원의 선생님은 말했지요.

누님은 처음에는 바깥 자연물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진정한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지요. 죽은 소녀의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끝에 비로소 그것을 찾아낸 것이지요. 누님이 몸을 던져 쓴 그 시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입니다.

착한 사람, 양심이 있고 용기가 있는 사람, 이 세상에서 참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신 미자누님, 누님이 꿈꾸었던 대로 부디 ‘검은 강물’을 건너 소녀와 만나 밝게 웃으며 손잡으시기를 빌게요. 안녕히 가세요.

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