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영화] 해바라기

Sunflower, 감독 강석범, 출연 김래원, 김해숙, 허이재, 2006.

울고 있는 태식이를 보니까
이놈은 나이가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지
나쁜 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 해바라기

다시는 울지 않겠다

“니네 그러면 안 됐어.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이 새끼들아!”

오빠가 조판수 회장에게 찾아가 내지른 소리지요. 얼마나 그놈들이 미웠으면 욕설까지 섞어가며 울부짖었을까요.

다시는 싸우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오빠, 그것만큼은 꼭 지키려고 이를 악물고 참고 참았던 오빠, 그러나 더는 그대로 있을 수 없었지요. 자기네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빼앗고 못살게 구는 놈들,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지요.

그렇지만 어찌 그렇게까지 했나요? 제가 병실에 누워있을 때 “내가 죽어도 널 지켜줄게.” 하고 말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인가요? 착한 오빠, 바보 같은 오빠, 가엾은 오빠,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미어진답니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

오빠가 처음 우리 집에 오던 날을 떠올려봅니다.

그날 웬 남자가 주춤거리며 문을 들어설 때만 해도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요. 엄마가 “우리 태식이 왔구나?” 하며 반갑게 맞이하는 것도 웬일인가 싶었고, 우리 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른 것도 뜻밖이었지요.

나는 오빠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 엄마가 유난히 호들갑스레 챙겨주는 것도 눈꼴사나웠지만 그보다는 오빠가 되게 미련스러워 보였거든요. 엄마가 듬뿍 싸서 먹여주는 상추쌈이 아무리 크다고 어쩜 그렇게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어요? 저런 미련곰탱이가 오빠라니, 개뿔!

그래서 내가 오빠를 따로 불러놓고 따끔하게 충고를 한 번 했지요.

“야! 내가 너 인생사는 데 도움 되라고 한마디만 해주겠는데, 멍청한 건 불쌍한 게 아니라 나쁜 거야. 주변 사람들 힘들어지니까. 알았냐?”

오빠의 비밀

그래도 여자 둘만 살던 우리 집에 오빠가 들어오면서 활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사실 우리 집은 도필이 오빠가 죽고 나서 십 년 동안은 죽은 세상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엄마의 신세타령과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 소리만 들리는 사막 같은 곳이었지요. 그렇다고 내가 아무한테나 오빠라고 부를 수는 없지요. 그래서 미리 오금을 박았어요.

“나한테 오빠 대우 같은 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오빠를 함부로 대하자, 마침내 어느 날 엄마가 오빠에 대한 사실을 털어놓더군요. 나는 엄마에게 따졌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어떻게 친자식을 죽인 사람을 아들로 삼을 생각을 할 수 있냐고?”

엄마는 도필이 오빠 장례를 치르고 나서 면회를 하러 갔었다고 하네요. 도대체 무슨 원수가 졌기에 우리 아들을 죽였느냐고 따지러 갔다는 거예요.

“잘못했다고 애처럼 울더라. 내 생전 그렇게 서럽게 우는 놈은 못 봤어. 그렇게 울고 있는 태식이를 보니까 이놈은 나이가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지 나쁜 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며칠을 더 찾아갔다가 정이 들어서 십 년을 지켜봤다. 괜찮은 녀석이더라. 그래서 아들 삼기로 한 거고.”

오빠는 세차장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첫 월급을 타서 엄마의 선물을 사 왔지요. 예쁘장한 신발이었습니다. 엄마가 얼마나 감동했는지요. 오빠는 내게도 선물을 내놓았어요. 이게 웬일입니까?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피앤피가 아니겠습니까.

고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자존심 내려놓을 수는 없지요. 그 정도에 마음이 흔들릴 희주가 아니지요. 어림도 없다고요.

악당들의 괴롭힘

오빠는 참 덩칫값도 못 했어요. 용기도 없고 싸움도 못 하고 불량배들한테 두들겨 맞기만 했잖아요. 언젠가 동네 불량배 상철이가 나를 붙잡고 성가시게 할 때, 오빠는 조심조심 말했지요. “희주 그냥 놔두면 안 될까?” 그게 녀석한테 통하겠어요?

오빠는 그날 수도 없이 맞았지요. 아무 대항을 못 하고 때리는 대로 맞은 오빠. 다행히 오빠를 살려준 것은 문신이었지요.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용 비늘 무늬를 보고 녀석들은 겁에 질려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지요. 내 참 그게 뭐라고. 나는 어쭙잖게 나를 구하려다 봉변을 당한 오빠가 가엾어서 상처에 바를 약을 사다 주었지요.

오빠는 참 분수도 모르더군요. 어느 날 학원에서 오빠가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았지요. 왜 왔냐고 했더니 대학에 가기 위해서 영어를 수강하겠다는 거예요. 참 어이가 없었지요. 그래서 내가 영어만 가지고는 안 되고, 다른 과목도 들어야 한다고 훈수를 두었지요. 그러니까 오빠가 하는 말이 다른 과목은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고 보니 오빠는 교도소에 있는 동안 공부를 했던 거예요. 특히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수학을 잘했어요. “거기 있을 때 수학 선생님 한 분이 오셨거든.” 교사 출신 수형자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면서, 골치 아픈 적분 문제를 척척 풀어주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거 봐라 싶었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 그동안 불러오던 호칭을 바꿔줄 수는 없지요.

“그냥 오빠라고 부르지. 내가 좋은 오빠 될 자신 있는데.”

“미안한데, 난 좋은 동생이 될 자신이 없거든?”

오빠는 수첩을 하나 갖고 다녔어요.

어느 날 그것을 빼앗아 읽어보니 웃음이 나오더군요. 맨 첫 장에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라고 다짐이 적혀 있었지요. 어린애도 아니고 그게 뭐예요.

그리고 그다음이 더 웃겼지요. ‘호두과자 먹기, 대중목욕탕 가서 목욕하기, 길거리에서 오줌 누기, 배 터지게 콜라 마시기, 머리에 염색하기, 선물하기, 소풍 가기, 숨 막힐 때까지 여자하고 뽀뽀하기, 방송국 녹화 구경’ 따위가 적혀 있었지요.

아마 교도소에 있을 때부터 희망 사항들을 그렇게 적어놓은 거겠지요. 그 가운데 ‘호두과자 먹기’와 ‘대중목욕탕 가서 목욕하기’, ‘선물하기’는 가위표가 그어져 있더군요. 벌써 이루었던 모양이지요.

“뭐가 이렇게 시시하냐? 기분이다! 이건 내가 해준다.”

나도 수학 문제 도와준 것도 있고 해서 선심을 한 번 써주기로 했지요. 그게 ‘소풍 가기’였지요. 그래서 엄마 모시고 야외에 나가 바람 쐬면서 수박도 깨 먹고 노래도 부르며 단란한 시간을 보냈지요. 그날 엄마는 말했지요. “우리 아들 대학 가면 등록금은 이 엄마가 책임진다. 파이팅!”

그 무렵 엄마는 나쁜 놈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었어요.

지금 운영하는 식당을 내놓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자기네가 거기다가 큰 상가건물을 지으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 식당은 엄마가 도필이 오빠와 함께 힘들게 마련한 것이라서 조금도 나갈 생각이 없었지요.

어느 날 그놈 패거리들이 식당에 행패를 부리러 왔다가 태식이 오빠가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고 달아나지요. 오빠에게 잘못 걸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지요. 그들은 나중에 오빠가 세차장에서 일하는 틈을 타서 식당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나도 하굣길에 오토바이 괴한의 벽돌에 얼굴을 맞고 쓰러지게 됩니다.

결국, 오빠는 조판수 회장에게 찾아가서 고개를 숙였지요.

“제 식구들을 데리고 여길 떠나겠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팔 하나만 내놓으면 보내줄 생각도 있지. 어쩌겠는가?”

오빠의 희생

결국, 오빠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팔을 내놓지요. 놈들은 오빠가 주먹을 쓰지 못하도록 손목의 힘줄을 끊어버리지요. “숟가락은 들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그때 칼질을 한 사람이 다행히도 예전부터 오빠와 친분이 있던 병진이 형이었지요. 그는 오빠를 데려다주며 말했습니다.

“태식아. 네 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리고 여기 떠나서 잘 살아라.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런데 놈들의 행패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집에 찾아와 엄마의 목을 조른 것이지요. 엄마는 이미 “그래 떠나자. 까짓것 내가 어디 가선들 못 살겠냐.”하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지요. 엄마는 오빠가 사준 신발을 방에 모셔놓은 채 한번 신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오빠는 엄마의 시신을 안고 펑펑 울었지요. 그리고 술도 마셨지요. 희망 수첩에 써놨던 세 가지 다짐을 더는 지켜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오빠는 조판수의 유흥업소 개장식에 나타났습니다.

“내가 십 년 동안 울면서 후회하고 다짐했는데, 꼭 그랬어야 했니?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라더라. 알아들었냐? 지금부터 내가 벌을 줄 테니까 달게 받아라.”

오빠는 언젠가 조판수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며 물었어요.

“우리 희주 얼굴 그렇게 만든 놈 누구냐?”

“왜? 새끼야. 내가 그랬다. 꼽냐?”

그는 뜻밖에도 예전에 나를 쫓아다니던 상철이었지요. 그 얄미운 새끼가 어느새 조판수의 똘마니가 되어 있었던 거예요. 칼을 들고 덤비는 녀석을 오빠는 단숨에 팔을 꺾어버리지요.

오빠는 병진이 형을 나가게 한 뒤, 휘발유가 뿌려진 바닥에 담뱃불을 던지고는 조판수 부하들과 격투가 벌어지지요. 신들린 오빠의 주먹과 발차기 앞에서는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식당에 와서 행패를 부린 창우, 그리고 엄마의 목을 조른 양기도 달려들지만, 오빠의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휘두르는 칼과 각목에 오빠도 피투성이가 되지요. 오빠는 도망치는 조판수까지 쫓아가서 엄마의 원수를 갚습니다. 그리고 불구덩이 속에서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엄마야. 희주야. 미안해.”

착하게 살아보려고 애쓰던 오빠,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속죄하며 웬만해서는 참고 지내려고 했던 오빠, 죽은 친구를 대신하여 아들 노릇을 하려고 했던 오빠, 내가 그토록 멸시하고 구박했어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응석을 받아주던 오빠, 내가 오히려 미안해요.

오빠의 진심을 좀 더 일찍 깨닫고 잘해줄 걸 내가 너무 철이 없고 짓궂었어요. 그래도 내가 얼굴을 다쳐 병원에 누워있을 때 “오빠!”라고 한번 불러주었지요. 그런데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이야!

오빠는 우리 집에 살면서 수첩에 희망 사항, 하나를 더 추가했지요. ‘희주와 같은 대학 가기’, 좋지요. 오빠와 같은 대학에 다닐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네요.

오빠를 향한 그리움

엄마의 식당 이름인 해바라기, 그 꽃말이 ‘애모’와 ‘숭배’이지요. 줄곧 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습성 때문에 그런 꽃말이 생겼겠지요. 오빠는 우리 집에서 누구에 대한 해바라기였나요? 엄마? 아니면 나 희주? 괜한 질문을 했네요. 물어보나 마나 오빠는 엄마와 나 모두에 대한 해바라기였지요.

엄마와 나도 모두 오빠를 향한 해바라기였고요. 그런데 이제는 엄마도 가고 오빠도 가고, 해바라기가 될 수 없으니 눈물만 나네요.

참, 오빠가 모르고 있는 사실 하나를 알려 줄게요.

나 대학을 수학과로 갔어요. 그리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수학과 조교를 하고 있고요. 고등학교 때 수학 때문에 골치를 앓던 내가 이렇게 수학 전공자가 될 줄이야 오빠도 뜻밖이지요?

오빠, 나는 지금 가족사진을 보고 있어요. 엄마를 가운데 두고 오빠와 내가 활짝 웃고 있지요. 오빠가 선물로 사준 피앤피로 찍은 유일한 사진이지요. 오빠가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본답니다. 오늘은 이만 줄일게요. 오빠의 안녕을 빌어요. 엄마 덕자 씨께도 안부 전해줘요.

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