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첫 걸음, 글쓰기의 시작

작가의 첫 걸음, 글쓰기의 시작

작가의 첫걸음, 글쓰기의 시작은 언어의 진화와 글의 역할을 살펴보며 편지의 힘, 글쓰기의 치유와 성장, 영향력 등 다양한 작가로의 시작을 이야기합니다.

K 씨에게 보내는 글

왜 글을 쓰는가


언젠가 당신은 제게 왜 글을 쓰느냐고 물었습니다. 글을 써서 돈은 얼마나 벌었느냐는 원색적 질문도 하셨지요. 그 말에 저는 빙긋 웃기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만 오늘은 그 답을 드리려 합니다. 기실 그 두 가지는 간과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이기도 해서 저는 에두르지 않을 생각입니다.

K 씨도 아시다시피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이야기(말)를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갓난아기들도 일정 시기가 되면 옹알이라는 걸 하잖아요.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도 하지만 때론 저 혼자서 천장을 바라보며 무어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러다 재미있다는 듯 웃기도 하지요.

아기가 최초로 말하는 음성언어는 외계어 같아서 알아들을 수 없었어도 아기 스스로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기의 언어는 곧 아기가 언어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기도 하였지요.

‘이야기 하는 인간’인 호머 나랜스(Homo Narrans)들은 성장하면서 자기가 일상 안에서 느꼈던 소회를 일기로 쓰던지 작문을 통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품게 됩니다. 요즘은 SNS의 확산으로 만인이 작가인 시대가 된 듯한 느낌마저 들더군요.

우리 모두가 젖먹이 시절에 경험했던 옹알이는 제대로 된 언어를 습득하면서 말로 발전하였지만 음성 언어란 입 밖으로 나온 즉시 사라질뿐더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그 정확성을 잃고 맙니다. 음성 언어의 한계는 인류로 하여금 문자의 출현을 당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휴대폰의 문자를 비롯해 직장의 업무보고서이든 개인적인 잡문이든 제대로 된 문학이든 누구나 글쓰기를 생활화 하며 살아갑니다. 수많은 갑남을녀들이 하구한날 인터넷을 통해 보도되는 정치 사회문제에 댓글을 올림으로써 단문으로나마 자기 의사를 글로 납깁니다.

하여 K 씨를 비롯한 우리는 모두 나름의 작가가 되고 만 것 같습니다. 단지 프로냐 아마추어냐, 혹은 일시적인가 지속적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그래요, 우리는 이야기(말) 하는 인간이 글 쓰는 인간으로 옮겨가는 세상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짧은 잡문을 제외한 글쓰기 중 모두가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글일까요? 제 생각엔 자신의 일상적 이야기나 관심분야를 풀어내는 글이나 자신의 인생을 담은 수기 혹은 수필 류의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풍부한 상상력과 문학적 기량 등이 요구되는 소설과 언어를 정제하고 압축하며 상징과 은유로 풀어내는 시 쓰기와 달리, 수필은 일찍이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써왔던 작문이나 일기 같은 글의 연장선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지요.

하기에 누구나 친숙하고 쓰기 쉬운 글이 수필이면서 누구나 쓴다고 모두가 작품이 되는 건 아닌 것이 또한 수필이 가진 두 얼굴이기도 합니다. 한편, 글이란 그것이 필자의 품을 떠나 활자화를 거치면 독자를 만나게 마련이고, 독자에게 넘어 간 글은 읽은 이들의 보편적 공감을 얻어내야만 확장성과 생명력이 생기는 것이기에 글을 쓸 때는 이런 요소까지 염두에 두어야만 자신의 작품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30년이 넘게 수필을 써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는 K씨를 비롯한 주변 지인들에게 글을 써보라는 권유를 입버릇처럼 하는 편입니다. 그럴 때 돌아오는 답은 대체로 “나는 글에 취미도 없고 재주도 없어 못 쓴다.”였지요. 그래도 저는 물러서지 않고, 뛰어난 작가가 안 되어도 좋으니 써보라고 재차 권합니다.

이건 그저 던져보는 빈말이 아닌, 글을 쓰는 일이 당사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에 하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겪은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볼까 합니다.

왜 글을 쓰는가

등단하기 몇 해 전의 일입니다. 1988년도 1월, 제 남편이 몇 차례의 미역국을 먹은 뒤 운전면허를 따냈던 날 저녁이었습니다. 이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남편은 귀가 후 저녁을 뜨는 둥 마는 둥 먹고는 저의 만류도 뿌리친 채 시범 운전을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큰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시내 한 바퀴를 잘 돌고는 김포가도 대로변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려고 기다리다가 신호가 바뀌어 핸들을 꺾던 찰나 직진해 오던 택시와 충돌하여 사고가 났던 겁니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각 과속으로 달려오던 운전기사는 남편과 함께 중상을 입은 뒤 같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망자는 젊은 총각인 데다가 2대 독자라고 하여 제 가슴도 무너지고 찢어졌지요.

가톨릭 신자인 저는 그 길로 죽은 운전기사의 영혼을 위해 위령(慰靈)미사를 청했습니다. 중태였던 남편은 다행히 의식이 돌아왔지만, 교통사고 담당 형사에게 마취가 덜 풀린 상태에서 혼자 취조를 받던 중 유도신문에 잘 못 대답하여 본인이 신호위반을 한 것으로 결론이 나버렸습니다.

저의 반대를 무릅쓰고 면허도 따기 전에 성급히 구입해 집 앞에 세워뒀던 승용차는 사고 현장에서 무참하게 파손되어 수습 당시엔 구겨진 종잇장 펴듯 하면서 남편을 끌어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 저의 가정은 졸지에 쑥대밭이 돼 버렸고, 생활비는 물론 이미 폐차 된 승용차의 할부금을 비롯해 사망자 가족에게 합의금을 지불해야 하는 막막한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망자의 부모는 합의금조로 1억을 요구했습니다. 1억은 지금도 억 소리 날 만큼 큰돈이니 당시로선 더 말할 나위가 없었지요. 한데 우리 형편이라는 게 비축했던 돈도 없이 매달 빠듯이 살아가던 터라 그 암담함이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명 사고이기에 남편은 얼마간 치료를 받은 뒤 구치소에 수감되었고, 저는 난생 처음 변호사를 선임하랴, 유가족에게 치를 합의금을 마련하랴 발바닥에 불이 나고 눈앞은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고민 끝에 어느 날 저는 백지를 꺼내놓고 입으로는 도저히 전할 수 없는 말을 편지로 적어 변호사와 사망자 부모님에게 각각 보냈습니다. 유족 측을 만나는 일도 두려워서 엄두가 안 났지만 용기를 내어 연락해 봐도 그들은 슬픔과 충격이 극에 달해 협박과 저주의 말만 퍼부을 뿐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편지의 내용은 사고로 인해 아픔을 겪고 있을 가족에게 깊은 사죄와 위로의 뜻을 전한 거였습니다. 덧붙여서 사람의 목숨 값을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을까만, 1억을 보낸들 죽은 이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겠을까만, 저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도저히 그 돈을 마련할 수 없으니 염치없지만 금액을 줄여주면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요지로 적어나간 글이었지요.

그러자 며칠 후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으로부터 수임료를 절반으로 깎아주겠다는 전화가 걸려왔고, 더 놀라운 건 사망자의 부모님으로부터 합의금을 억만금 준다 해도 용서하지 않으려 했으나 저의 편지를 읽은 뒤 마음이 움직여 제 남편에 대한 원망을 거두려는 마음을 갖게 됐다면서 합의금은 백만 원만 보내라는 답을 보내온 거였습니다.

큰 기대를 하지 못했던 터라 저는 놀라움과 고마움에 눈시울이 젖고 가슴이 떨렸습니다. 종잇장 위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썼던 두어 장의 손 편지가 이런 기적 같은 일을 가져오다니요. 두말 할 것도 없이 이것이 바로 글의 힘, 제 진심을 담아 보냈던 편지 글의 위력이었던 겁니다.

얼마 전 저는 수필가들 모임에서 특강을 하다가 이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한 분이 절더러 글(편지)을 써서 1억을 벌었다고 하더군요, 수필집이 잘 팔리지 않는 시대라며 의기소침했던 저는 그 말에 공감의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글을 써 본 사람들이라면 알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건, 특히 생활문이나 수필을 쓴다는 건 누구보다도 우선 필자 자신을 유익하게 합니다. 글을 적어나가는 동안 자신을 보다 깊이 만날 수 있고 거기에서 자기 치유가 일어나며 또한 삶을 기록해두는 것으로서 자기 인생이 보다 정확히 기억되고 정리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써나가며 문장을 다듬고 적확한 단어를 찾는 과정을 통해 사고가 명료해지고 글이 점차 유연하고 명확해 지는 것도 덤으로 따라오는 선물이지요.

한편, 필자를 치유한 글이 활자화되면 그 영향력은 작가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글을 읽은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사회를 정화하는 데까지 파장이 번지기도 합니다. 이거야말로 글을 쓰는 이들에겐 큰 의미이자 보람일 것입니다. 물신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돈도 되지 않는 글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쓰고 있는 것은 이런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좋은 글이란 유려한 문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글의 진실성이 선제되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좋은 글이란 우선 삶을 통과하여 육화된 내용을 담아내는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은 수필을 쓰려면 자기 풍부(豐富)와 자기의 미(美)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지만 저는 이 말을 역으로 바꿔보고 싶군요. 수필을 쓰다보면 알게 모르게 자기 풍부와 자기의 미를 지니게 된다고 말입니다. 자기 풍부란 자양분이 될 만한 책을 찾아 읽음으로 이룰 수 있고 이런 것이 축적되면 자기의 미는 절로 우러나게 되겠지요. 아울러 글쓰기 수련을 하게 되면 이런 요소들이 더욱 구체화되며 작가의 인생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이제는 K 씨도 제가 왜 글을 쓰는지를 이해하셨겠지요. 그렇다면 당신도 오늘, 아니 바로 지금, 몇 줄의 글이라도 써보면 어떨는지요. 어느 날의 단상이든 제 편지에 대한 독후감이든 상관없습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몇 줄의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첫 걸음을 내딛는 게 될 테니까요.

마치며

오늘의 제언 : 무슨 글이든 일단 짧게라도 시작해보자.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민혜 저자의 [글쓰기, 당신의 초능력 잠금 해제]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