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초석, 사물 관찰의 중요성

사물에 대한 의미화

글쓰기의 초석, 사물 관찰의 중요성을 나눠봅니다. 글쓰기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는 초보자들에게 조언과 경험을 전하며, 첫 글의 성공과 사물에 대한 ‘관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글쓰기를 통한 고독 극복, 언어의 역할, 그리고 행복의 크기를 언어로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간결하게 소개합니다.

K 씨에게

감동입니다! 생각보다 글을 빨리 보내오셨네요. 덩달아 제 마음도 바빠져 답신 쓸 일이 살짝 부담 되었지만 님의 열정이 느껴져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제 성격이 좀 급한데다가 미적지근한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반가움이 더 컸던가봅니다.

각설하고, 일단 처음 썼던 글 속의 긴 문장들을 두 세 토막으로 나눠 본 시도는 성공적입니다. 문장을 쪼개 봐도 아직 어색한 부분이 남아 있긴 했으나 읽기가 수월해진 느낌은 분명히 들었어요.

마치 먼저 글이 상추쌈 한 장 안에 너무 많은 걸 넣어 먹기가 힘들었다면, 이번 글은 모든 문장이 한입으로 쏙쏙 들어가는 듯했으니까요. 유념하십시오. 한 문장에 많은 걸 담으려하지 말 것. 초보는 특히 이 점에 신경 쓸 것. 많은 것을 담다가는 망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감정의 조절과 글쓰기의 관계

배우자와 사별한지 반년 정도가 흘렀다면 아직은 감정의 조절이 쉽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때문에 글에서도 날 감정이 그대로 발산됐을 거예요. 누구에게든 글을 쓰기에 좋은 시간은 몸 건강은 물론 마음도 평안하여 정신이 맑을 때입니다.

슬픔이든 분노이든 감정이 격해 있을 땐 투명한 의식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다는 말이지요. 평정심을 찾기까지의 시간은 개인차가 있을 테니 스스로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심적 여유가 생길 때까지 쓰는 일을 보류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한편으론 집필로 마음을 다스려보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후자 쪽을 택한 편이었지요. 기왕에 작가의 꿈을 품으셨다면 부담이 적은 소재로 바꿔 글을 써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먼저 편지에서 제가 <비아그라 두 알>이란 글을 쓴 게 남편이 떠난 지 2개월 여 되었을 때라고 했지요. 그 얘기를 하면 일부 작가들은 어떻게 그리 빨리 글을 쓸 수 있었냐고 묻기도 합니다. 제 생각으론 죽음에 대해 일찍부터 천착해온 때문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 또한 저의 급한 성정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저는 서른 무렵부터 죽음 문제를 생각했어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이 문제를 정시하려 한 것은 죽음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축적됐을 죽음에 대한 다상량(多商量)이 저로 하여금 사별의 우울 속에서도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준 게 아니었나 싶은 거지요.

저는 성격이 소심하고 겁이 많음에도 극단의 상황에선 자신을 억누르고 두렵게 하는 것을 피하지 않고 맞장뜨려는 의외성도 있어 이 점을 스스로 흥미로워 한답니다.

남편의 교통사고 사태를 수습할 때도 지인들이 운수회사에 동행해주겠다고 하는 걸 마다하고 그야말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갔습니다. 남편이 누워 있는 병원으로 운전기사들 여남은 명이 찾아와 으름장을 놓았을 때도 저만치 자리를 옮겨 혼자 그들을 상대했고 말입니다.

아직 담담해진 입장이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간단한 일상이나 주변 사물에 대한 스케치를 해보는 건 어떨는지요? 계절과 관계된 사물을 소재로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써 본 글의 제목이 <늙은 호박>이었는데, 그게 늦가을에 쓴 거였거든요.

글쓰기를 배워보겠다고 동아일보사 문화센터에 등록하고 강의실에 갔더니 지도 교수님이 글 한편씩을 써오라고 하셨습니다. 글(수필)을 한 번도 써 본적이 없었기에 저는 뭘 쓸까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 사왔던 늙은 호박에 대한 것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고는 원고지 13매(저는 원고지 세대입니다)를 거뜬하게 채울 수 있었지요. 그건 제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즈음의 어느 날 아는 신부님께 문안 편지를 쓰다가 늙은 호박 얘기를 썼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님께 편지를 쓰던 그 날, 저는 서두에 인사말을 몇 줄 쓰고는 저도 모르게 늙은 호박을 바라보았습니다. 실은 그 며칠 전부터도 계속 호박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편지에다 호박을 보며 느꼈던 소감을 그대로 풀어놓곤 마무리인사로 끝을 맺었지요.

저는 편지 글에서 늙은 호박 부분만을 따내어 한 편의 수필로 썼기에 어렵지 않게 끝낼 수가 있었던 겁니다. 기쁘게도 지도 교수님은 그 글을 매우 호평해주셨어요. 사물을 보는 눈이 수필적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수님께 수필적이란 게 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교수님의 대답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물에 대한 ‘관조’와 글로 풀어내기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선 사물을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 무심하게 보던 사물도 깊이 통찰하면 거기에서 글감이 떠오르고 풀려나온다. 그것을 의미화 하고 자기화 하면 한편의 수필이 탄생된다.’

‘관조’니 ‘의미화’니 ‘자기화’니 하는 식의 단어가 생소하긴 했지만 제 글과 연관지어보니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저의 처녀작 <늙은 호박>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며칠 전 나는 동네 할머니에게서 늙은 호박 한 덩이를 사들고 왔다. 호박죽을 쑤려고 사온 것인데 웬일로 선뜻 칼을 댈 수 없었다. 내 눈엔 그 늙은 호박이 잘 빚어진 도자기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는 안존한 모습의 노(老)마님으로 보이는 거였다.’

이렇게 풀어간 글은, 장차 내가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되었을 때 저 늙은 호박만큼의 모습을 지닐 수 있을 것인가로 전개되다가, 호박죽을 만들려고 호박을 쪼개는 사연으로 바뀐 다음, 말미 부분에선 호박의 텅 빈 속을 바라보며 와 닿았던 감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끝나지요.

요약하자면, 늙은 호박을 보며 처음엔 호박의 외양이 풍기는 멋과 품위에 관심이 쏠렸지만 쪼개놓고 보니 늙은 호박의 품격은 결국 자기를 비워내는 과정에서 이뤄진 거라는 깨달음으로 마무리한 글이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저는 첫 글의 성공(?)에 신이 났습니다. 그날로부터 사물의 ‘관조’ ‘의미화’ ‘자기화’를 가슴에 새겼습니다. 일반적으로 처음 글을 쓰는 분들은 개인의 신변사를 소재로 많이 택하는데, 저는 사물에 대한 글을 시도한 편이었습니다.

그래 선가 제 등단작품도 ‘된장’을 소재로 한 <五德 마님>이란 글이었지요. 이제 보니 늙은 호박도 그렇고, 오덕 마님 역시도 잘 늙어가며 살아야겠다는 중년의 제 마음이 투영된 글이 아니었나 여겨집니다.

저는 원고지 세대라서 초기의 글들은 거의 사라졌어요. 당시 창작수필지엔 등단 전이어도 우수한 글을 실어주는 코너가 있어 제 글도 몇 편 실렸었지만 책을 정리해버린 바람에 하나도 남아 있질 않습니다.

그럼에도 내용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호박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을 신부님께 보내는 편지에 쓴데다가 다시 수필로 완성했으니 깊게 각인돼 있는 거지요.

사물에 대한 의미화

혹시라도 님께서 저처럼 글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가까운 주변 사물이나 집안의 소품을 소재로도 써보십시오. 지금 커피를 마시고 있다면 커피에 얽힌 일을 끄집어내 보는 것도 좋겠지요. 커피, 하고 입속으로 뇌는 순간 그 하나의 단어에서도 다양한 사연들이 따라 올라올 겁니다.

이렇듯 풀어내기 쉬운 것, 익숙한 것부터 해보자는 거지요. 현재 보이는 풍경이나 순간을 짧은 글로 묘사해보며 잠깐씩 글 놀이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 또한 내공을 쌓는데 일조할 테니까요.

동네를 거닐다가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야채 행상을 하며 쪽파를 다듬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떠오른 소감 같은 것도 괜찮겠군요. 사물이나 풍경, 더 나아가 주변 인물들에 대한 관찰과 관심을 지니는 가운데 문학과의 친교도 확장될 것입니다.

문학의 효용가치와 언어의 역할

‘문학’이란 말을 하고 나니 거창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문학의 효용가치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 맞닥뜨릴 수도 있겠으나, 아래의 글을 읽어보시면 또 다른 느낌이 드실 줄로 압니다. 이 글귀는 오늘 아침에 저의 예전 메모장을 들췄다가 발견한 내용입니다. 누구의 말이었는지, 어느 책에서 읽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나누고 싶어 옮겨봅니다.

‘언어란 고독한 개체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인간과 세계, 그리고 타인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줌으로써 고독을 해소하고 연대감으로써 안정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최선의 기능이다. 문학이란 그러한 언어가 최상으로 세련된 형식인 것이다.(중략)

우주는 네가 알고 있는 언어의 크기만큼 네 앞에 열리며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네 행복감은 그 우주의 크기만큼 커지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우주의 근원인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만큼 네 언어가 정제된 것이게 하라. 최고의 행복이 너의 것이 되리라.’

추신: 아참,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게 있네요. 먼저 편지에서 <우동 한 그릇> 얘기를 하겠다고 했었는데 오늘 답신이 영 다른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제 편지라는 것이 그날의 기분대로 써지기에 이리 된 것 같아요.

마치며

* 오늘의 제언 : 언어란 고독한 개체에게 세계와 타인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줌으로써 고독을 해소하고 연대감으로써 안정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최선의 기능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민혜 저자의 [글쓰기, 당신의 초능력 잠금 해제]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