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ce Upon a Time in China, 감독 서극, 출연 이연걸, 관지림, 원표, 1991.
패기는 만 겹의 파도에 맞서고,
끓는 피는 붉은 태양과 같이 빛난다.
황비홍,위기의 조국을 맨몸으로 막다
운명과 시대, 영웅을 빚어내다
사람이 시대를 만들기도 하지만 시대가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가정해보면 우리 역사에서도 만약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순신 장군 같은 분도 역사적 인물로 떠오르지 않았고,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일도 없지 않았겠는가.
겨울철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는 선현의 말처럼 사람의 진가도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 같다.
19세기 말 중국, 격변의 시대 속 영웅의 등장
서극(徐克) 감독의 <황비홍(黃飛鴻)>(1991)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이 노골화되던 19세기 말의 청나라를 배경으로 기울어가는 조국을 지키는 한 열혈청년의 영웅적인 활약을 그렸다.
무술관의 사부이자 의사이기도 한 황비홍은 중국인들을 붙잡아다 미국에 노동자로 팔아넘기는 서구세력과 그들에 빌붙는 폭력조직을 보고, 분연히 싸워 잡혀간 이들을 구했다.
이연걸, 무술의 경지를 넘어선 아름다움
앞머리를 밀고 뒷머리를 딴 변발 모습의 이연걸(李連杰)은 명민한 눈빛과 단아한 인상, 날렵한 몸동작과 신기에 가까운 화려한 무술 솜씨로 관객들의 넋을 빼앗는다.
도입부에 나오는 선상 사자춤에서부터 시작하여 총검을 든 서양인들과 싸우는 마지막 부분까지 종횡무진 화면을 압도하는 그의 무예는 싸움이라기보다는 곡예나 무용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숨 막히는 액션, 황비홍 무술의 진수
무술영화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결투 장면이라고 볼 때, <황비홍>은 이전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무술을 다채롭게 선보이며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우산을 무기 삼아 불량배들을 제압하는 모습이나 경극 공연장의 창술, 전봇대만 한 기둥이 날아다니는 빗속의 결투, 사다리를 타고 이리저리 넘나들며 싸우는 창고 안의 장면 따위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묘기가 아닐 수 없다.
액션 속 피어나는 은은한 로맨스
이렇듯 숨 막히도록 날고뛰는 싸움판에서 여주인공과의 은근한 로맨스는 오아시스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관지림(關芝琳)이 서양물을 먹은 여성 역할을 맡아 서양 모자와 드레스 차림으로 입식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크고 부드러운 눈망울로 주인공의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비록 본격적인 애정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두 사람의 보일 듯 말 듯 한, 심리적인 교감은 여느 격정적인 장면 못지않게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을 준다. 이러한 여운이야말로 서양인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동양적인 모습이 아닐까.
황비홍, 걸작이라 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참 잘 만들었구나!’ 감탄을 거듭했다. 쟁쟁한 배우들도 그렇고, 빼어난 무술 장면도 그렇고, 탄탄한 줄거리 또한 더할 나위 없었다. 역시 서극 감독은 동양의 스필버그라는 별명이 붙을 만하다 싶었다. 특히 도입부에서 바닷가 무예 훈련 장면을 배경으로 들려주는 주제<남아당자강(南兒當自强)>는 얼마나 장쾌한가.
“패기는 만 겹의 파도에 맞서고, 끓는 피는 붉은 태양과 같이 빛난다(傲氣面對萬重浪 熱血像那紅日光).”라는 설사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비장한 결의로 무예를 닦는 사나이들의 씩씩한 기상이 뭉클하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가.
무엇보다 이 영화에 큰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시대상을 잘 반영한 점이었다. 영화 속의 싸움하는 장면은 단순한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는 애국적인 투쟁과 결부되어 있기에 더욱 의분을 자아내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나는 풍전등화의 조국을 지키고자 종횡무진 싸우는 주인공이 지극히 위대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찌 혼자 힘으로 무너지는 나라를 떠받칠 수 있을까 싶어 맨몸으로 총칼에 맞서는 그가 몹시 안타까워 보였다.
외세에 맞선 투쟁, 시대정신을 담다
주인공 황비홍(1847~1924)은 중국 광동 출신의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소림 계통의 무술인 홍가권(洪家拳)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의사로 활동하면서 백성들을 구제하고 항일운동을 펼친 민족 지도자로서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만도 수십 편에 이른다고 한다.
사실 성룡(成龍)의 출세작 <취권(醉拳)>(1978)의 주인공도 그와 같은 이름인 것을 볼 수 있다.
<황비홍>의 영화사적 의의는 1960년대 왕우(王羽) 이후 자취를 감췄던 무협 사극을 다시 불러낸 점이다. 장철(張徹) 감독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에서 시작되었던 무협 사극이 이 영화를 계기로 부활한 것이다.
<황비홍>이 나올 무렵 홍콩영화는 오우삼(吳宇森) 감독의 <영웅본색(英雄本色)>(1986)과 같이 암흑가를 배경으로 한 총잡이들의 폭력물이 대세였다. 바바리코트 차림의 주윤발이 색안경에다 담배를 꼬나물고 쌍권총을 난사하던 모습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황비홍, 실존 인물에서 영웅으로
그런데 <황비홍>이 나오면서 그 피 튀기던 홍콩 누아르의 아성이 무너지고 정소동(程小東) 감독의 <동방불패>(1993)와 왕가위(王家衛) 감독의 <동사서독(東邪西毒)>(1994) 등의 무술 사극이 등장했으니, 가히 <황비홍>은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작품이라 하겠다.
<황비홍>은 첫 작품의 흥행에 힘입어 <남아당자강>(1992)에서 <서역웅사(西域雄獅)>(1997)까지 다섯 편의 속편이 나왔으니 인기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2편에 경쟁이 붙어 그 수입가가 네 배 가까이 폭등했던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홍콩 영화의 진화와 기대
돌이켜보면 홍콩영화는 왕우에서 시작하여 이소룡(李小龍)과 성룡, 주윤발(周潤發)을 거쳐 이연걸에 이르기까지 걸출한 배우의 등장과 함께 진화를 거듭해왔다. 앞으로 어떤 영화가 어떤 인물을 앞세우고 나타나 또다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을지 지켜볼 일이다.
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