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확인한 순간의 기쁨에 넘친 모습을 어쩌면 그리도 아름답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청춘의 사랑, 그 아픔과 기쁨.
The Classic, 감독 곽재용, 출연 손예진, 조승우, 조인성, 2002.
클래식
15년 전 마음을 울렸던 영화
올해 문예대학 수강생들에게 영화를 한 편 보여주려고 생각했다. 감상문을 쓰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어떤 게 좋을지 고심을 했다. 요즘 흔한 폭력배들 주먹다짐 영화나 초능력으로 악당과 외계인을 물리치는 할리우드 영화는 재미는 있어도 내용이 단순해서 글 쓸 건더기가 없다.
좀 깊이가 있고 울림이 있는 영화가 없을까 궁리하다가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2002)을 선택했다. 이 영화에는 노래 몇 곡이 들어있다. 우선 영화에 앞서 노래를 들려주었다. 김광석이 부른 <너무 슬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과 한성민의 <사랑하면 할수록>, 자전거 탄 풍경<너에게 난, 나에게 넌>과 파헬벨의 <캐논> 따위였다.
혹시 노래를 들으며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무도 영화 제목을 맞히지 못했다. 15년 전의 영화지만 본 사람이 없었다.
두 시대를 넘나드는 감동의 스토리
<클래식>은 청춘영화이다. 엄마와 딸의 2대에 걸친 연애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사랑의 아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주인공 지혜는 엄마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먼지 낀 편지함에서 여고 시절의 첫사랑을 알게 된다.
엄마의 이름은 주희, 권세 있는 집 딸이었다. 여름방학 때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갔다가 준하라는 남학생을 알게 되는데, 함께 귀신 나오는 집에 다녀오다 원두막에서 소나기를 피하며 정이 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준하는 주희와 가까이 지내는 태수의 친구였고, 태수가 주희에게 보내는 편지의 대필자이기도 했다. 주희 아버지의 권세에 줄을 대려는 태수의 아버지는 아들이 주희와 인연이 맺어지기를 바라며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이때 준하가 끼어들어 한 여자를 놓고 두 남자가 경쟁하는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한편 대학생인 지혜도 친구 수경이를 통해 연극부장인 상민을 만난 뒤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상민도 지혜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중간에 수경이가 있어 여의치 못한 형편이다. 여기에서는 한 남자를 두 여자가 연모하는 삼각관계가 만들어진다.
엄마 주희의 사연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주희와 한창 가까워지던 준하는 돌연 태수가 목을 매자 충격을 받고 베트남전쟁에 나간다. 주희를 사랑하지만, 친구를 등질 수 없어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그러나 딸 지혜의 이야기에서는 상민이 수경이 대신 지혜를 선택함으로써 바라던 사랑이 이루어진다. 엄마 세대에서 이루지 못했던 사랑이 자식 대에 가서는 성사된 셈이다.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이 영화에서는 슬픈 장면이 자주 나온다. 준하가 베트남으로 떠나는 열차전송 장면과 전투를 하다 실명해서 돌아온 준하를 다시 만나는 장면, 그리고 준하의 유해를 강물에 뿌리는 장면 따위가 그것이다.
이때 두 눈 가득 그렁그렁 눈물이 어리는 주희의 표정을 보라! 엄마와 딸의 배역을 함께 맡은 배우 손예진의 눈물 연기는 김광석과 한성민의 애절한 노래와 더불어 관객의 슬픈 감정을 고조시켰다.
잊지 못할 명장면
아주 멋진 장면이 하나 있다. 비 오는 날 교정에서 지혜와 상민이 함께 옷을 둘러쓰고 도서관으로 뛰는 장면이다. 나중에 지혜는 상민이 우산을 일부러 놓아두고 빗속에 자기를 만나러 왔음을 알게 된다. 상민의 마음을 알아챈 지혜는 또다시 빗속을 뚫고 상민을 향해 달린다.
사랑을 확인한 순간의 기쁨에 넘친 모습을 어쩌면 그리도 아름답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배경에 흐르는 자전거 탄 풍경 노래와 함께 잊지 못할 명장면이다.
향수를 자아내는 풍경들도 심심찮은 눈요깃거리다. 선도부 학생들의 위압적인 교문지도, 교장 선생님의 운동장 조회 중에 쓰러지는 학생들, 대변검사 소동 등 1960~70년대의 학교 풍경들이 구석구석에서 양념 구실을 한다.
충격적인 장면도 있다. 주희가 준하와 가까워지자 이를 비관한 태수가 자살을 기도하는 대목이다. 나중에 그가 주희와 함께 준하의 파병 열차에 배웅을 나온 것을 보면 다행히 죽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지막 어느 순간 얼핏 비치는 결혼사진을 통해 결국 그가 주희와 맺어졌음도 확인할 수 있다.
반전의 결말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 결말은 아주 놀랍다. 지혜로부터 엄마의 과거사를 듣고 난 상민이 자기 목걸이를 꺼내는데, 그게 바로 옛날 준하가 지녔던 것이 아닌가. 이로써 그와 준하의 관계가 밝혀지며, 우연히도 그들의 사랑이 대를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상민이 지혜에게 반딧불이를 잡아주는 나무다리 장면은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주희와 준하를 떠올리게 하면서 기이한 인연의 대물림을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클래식”이라는 제목, 그 의미는?
이 영화는 왜 제목을 <클래식>이라 붙였을까. 물론 영화 속에서 지혜가 엄마가 받아놓은 연애편지를 보며 “좋아! 클래식하다고 해두지 뭐.”라는 장면이 있다. 편지로 애틋한 마음을 주고받는 모습은 휴대전화 만능시대인 요새와는 확실히 다르다.
또한, 황순원 소설을 연상시키는 원두막 장면이라든지, 연인끼리 목걸이를 정표로 주고받는 일 따위는 지금 정서와는 거리감이 있기에 그럴 만한 제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클래식>은 청춘영화이지만, 젊은이보다도 기성세대를 위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지난날의 그윽한 풍정을 통해 그 시대를 지나왔던 이들에게 아련한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화를 처음 볼 때 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우산과 목걸이, 편지의 의미를 생각하며 먹먹한 울림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보고 나서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영화, 여러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 한번 봤지만,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좋은 영화를 보는 시간은 언제나 행복하다.
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