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kes of Fire, 감독 임권택, 출연 최민식, 유호정, 손예진, 안성기, 2002.
주인공의 일생에 걸친 행적을 좇다 보니
묘사의 깊이를 잃어버린 것 같다.
취화선
깊이 있는 묘사가 설득력을 얻는다
지난해 임권택 감독이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우선 ‘취화선(醉畵仙)’이란 제목에 반했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천재 화가 오원(吾園) 장승업.
술과 여자를 좋아했고 한 시대를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살다 간 괴짜 예술가의 생애가 세 음절의 제목에 절묘하게 농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올봄에 영화가 완성되어 개봉과 함께 칸영화제 출품 소식을 들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최우수 감독상을 받게 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실 그동안 칸영화제는 우리나라로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높은 벽이 아니었던가.
우리나라 영화로는 2001년의 <춘향뎐>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경쟁 부문에 오를 만큼 그 문턱이 높았다. 그때까지 영화관에 가지 못했던 나로서는 영화에 대한 기대가 한껏 증폭되었다.
역시 <취화선>(2002)은 임 감독의 거장다운 솜씨가 전편에 배어 있는 노작(勞作)임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멋들어진 산천 모습을 배경으로 종횡무진 펼쳐지는 천재 화가의 예술적 생애는 상영시간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영화는 비렁뱅이 출신인 주인공이 어린 시절 한 선비의 눈에 띄어 그 재능을 인정받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장안의 세도가들이 그의 그림을 한 점이라도 소장하지 않고서는 행세를 못 할 만큼 이름값이 높아지고, 급기야 임금의 부름으로 궁궐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그로서는 답답한 궁중 생활을 견뎌낼 수가 없었고, 결국 궁궐을 뛰쳐나와 세상을 떠돌다가 어느 시골 도자기 가마터에서 생애를 마친다.
천재 화가 장승업의 예술적 생애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장승업의 천재적인 예술성과 음주벽, 여인과의 사랑, 한곳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 예술가적 고뇌 따위로 보인다.
중국의 산수화를 한 번만 훔쳐보고도 완벽하게 재현하는 “귀신이 춤을 추듯 신운(神韻)이 감도는” 그림 솜씨, 술병을 옆에 놓아두지 않고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호주가(好酒家)의 행태, 오르지 못할 나무였기에 먼발치에서 가슴만 태워야 했던 양갓집 규수에 대한 연모, 이어서 기생 매향과 만남과 헤어짐 등은 주인공의 인간적이고 개성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천민 출신으로서 사대부 세계의 권위와 가치관에 반발하는 것이며, 천주교 박해와 갑신정변, 동학혁명 등의 역사적인 사건들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은 역사적 인물로서 그의 존재를 생생하게 살려준다.
깊이의 상실과 평면적인 캐릭터
그런데도 영화를 보고 나서 어딘가 가득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 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깊이의 문제가 아닐까. 이 영화는 주인공의 일생에 걸친 행적을 좇다 보니 묘사의 깊이를 잃어버린 것 같다. 영화의 인물이 성공하려면 우선 성격 형상화가 확실해야 한다.
<취화선>에 나타난 주인공의 성격을 어떻게 종잡을 수 있을까? 어느 때는 예술과 세속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신분 사회의 반항아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억압사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주의자 같기도 한데, 이것이 평면적으로 나열되다 보니 뚜렷한 개성으로 살아나지 못했다.
감독은 여기서 어느 것 한 가지를 야무지게 붙잡아야 하지 않았을까. 예컨대 관습에 젖은 그림만을 찾는 세속의 요구와 싸우며 독자적으로 추구하는 예술적 경지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예인(藝人)의 집념을 부각한다든지, 아니면 신분 차별과 억압을 예술 행위로 승화함으로써 신분제도의 모순을 고발하거나 사회적 구속을 타파하고 예술적인 자유를 희구하는 인간상을 그린다든지 했더라면 주인공의 개성이 관객의 뇌리에 좀 더 선명히 박히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술을 좋아하는 주인공의 성격을 강조하여, 음주 행각과 더불어 술이 그의 예술 행위에 끼친 영향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든지, 주인공의 여성 편력에 초점을 맞추어 첫사랑의 여인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예술로 승화되는 사연을 곡진하게 그려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기의 그림 세계에 만족하지 않고 “달라지고 싶다!”라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대목은 지극히 예술가 영화다운 갈등의 제시다. 그러나 그 갈등이 비수를 찌르듯 관객의 가슴에 파고들려면 여러 가지 일화 중의 하나로 취급될 것이 아니라 영화의 중심 뼈대로 부각하여야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한국적인 정서와 한국미의 재발견
임 감독은 여기서도 그동안 줄기차게 시도해왔던 ‘한국적인 정서 드러내기’에 온 힘을 쏟는다. 영화 초반에 차를 내놓기 위해 준비하는 다도의 손놀림을 보라. 동방예의지국의 다도 풍속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가. 그밖에 전통 혼례의식의 재현이나 배경음악으로 우리 전통 가락과 악기를 쓴 것은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감독의 한결같은 애착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춘하추동을 고루 담은 빼어난 산천경개를 보라. 매화꽃 만발한 봄 동산과 광막한 개펄 풍경, 되새 떼가 난무하는 겨울 하늘의 장관과 숨 막힐 듯 가까이 보여주는 야생화들의 진한 아름다움, 빗물을 머금은 거미줄과 처마에 열린 고드름에 이르기까지 촬영감독 정일성의 카메라는 탐미적이기 그지없다.
또한, 이 영화에서 유난한 것은 한복의 멋이다. 꽃처럼 붉고 학처럼 우아한 기품이 서린 첫사랑 소운과 기생 매향의 옷맵시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이러한 장면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임 감독의 지론(持論)에서 나온 것으로서 분명히 칸과 같은 국제영화제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도야 어떻든 영화가 담고 있는 우리 산천과 전통 풍물의 멋은 평소 우리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잊고 있던 ‘한국미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우리가 장승업이 그리는 여러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이 화가인 덕분이다. 오로지 먹물 하나로 모든 것이 표현되는 한국화의 세계, 주인공의 말마따나 “일 획이 만 획이요, 만 획이 일 획이로다.”라로 단순화되는 선(線)의 미학이 색채미를 추구하는 서구인들에게는 신묘하게 비칠 터이다.
그런데 그 좋은 그림들을 차분히 감상할 수가 없는 것은 못내 아쉽다. 대개 카메라는 처음 붓을 대는 장면과 마지막 완성 상태를 대강 훑고 지나가 버린다. 그림을 그려나가는 붓놀림을 지그시 보여주고, 또 완성된 그림의 면면을 진득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정적(靜的)인 화면을 더 제공했더라면 좋았겠다 싶다.
<취화선>은 감독이 여느 영화 못지않게 공을 들인 작품으로 보인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한국의 토속적인 풍정(風情)을 정성 들여 기워 넣은 장인정신이 그렇거니와, 특히 이 작품을 찍기 위해서 양수리종합촬영소 2천 700여 평의 땅에 한옥기와 스물여섯 채와 한식초가 서른다섯 채를 세워 옛날 서울 거리와 시장터를 복원한 사실은 감독의 대단한 열의를 짐작게 한다.
넓이보다 깊이가 필요한 좋은 작품
시나리오의 짜임새 또한 탄탄하기 그지없다. 과감한 생략과 비약으로 너절한 사건들을 재치 있게 엮어가면서, 한편으로는 푸짐한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촘촘히 곁들이는 솜씨는 가히 고개를 끄덕여줄 만하다. 특히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수시로 전해지는 그림에 대한 이론은 관객들에게 지적(知的) 자극을 선사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욕심만 가지고는 감동을 자아낼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앞서 말했듯 주인공의 발자취를 바삐, 쫓다 보니, 정작 영화를 보고 난 뒤, 육박해오는 울림까지는 챙기지 못하고 말았다. 역시 좋은 작품의 요건은 넓이보다 깊이에 있는 것이다.
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