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영화] 축제

한국인의 장례 풍경 <축제>. 감독은 애초부터 이 영화에서 죽음의 비극성이나 효의 윤리를 강조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Festival, 감독 임권택, 출연 안성기, 오정해, 한은진, 1996.

영화 축제

부모의 죽음에 대해

어버이의 주검 앞에서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는 자식이 어디 있으랴. 한 어버이가 열 자식을 길러내도 열 자식이 한 어버이를 봉양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아무리 정성을 바친다 한들 어버이의 깊고 큰 사랑을 천만 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으랴.

그러기에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주검 앞에서 죄인 아닌 자 없으리라. 예부터 부모의 장례를 극진히 치른 것이나, 자손 대대로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온 것은, 따지고 보면 단순한 관습이라기보다는 본디 어버이의 은혜를 새기고자 하는 자식의 정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임권택 감독 영화 축제

이청준의 소설이자 임권택의 영화인 <축제>(1996)는 이러한 어버이의 죽음과 장례를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준섭은 어느 날 갑자기 모친 사망 소식을 듣고 서둘러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온다. 도중에 망인이 깨어나 장례 준비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임종 아래 모친은 숨을 거둔다.

그 이후로 몰려드는 일가친척과 문상객들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장례 의식이 진행되고, 사흘 뒤 장례식을 마친 가족이 함께 모여 사진을 찍으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는 죽음이라는 가라앉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 않다. <축제>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감독은 애초부터 이 영화에서 죽음의 비극성이나 효의 윤리를 강조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감독이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한국의 초상집에서 볼 수 있는 전통 장례식의 풍경이다.

이 영화는 망자의 콧구멍 앞에 솜털을 얹어 호흡 여부를 알아보는 ‘속광(屬纊)’이라는 의식에서부터 초혼(招魂)과 습렴(襲殮), 발인(發靷)과 하관, 실토(實土), 그리고 초우제(初虞祭)에 이르기까지의 복잡다단한 상례 절차를 마치 기록영화처럼 자막을 붙여 가며 소상히 설명해 준다.

가히 한국인의 장례 풍습에 관한 문화 인류학적 보고서라고 할 만하다. 외래 문물에 밀려 점점 우리 것을 잃어 가는 요즘 이처럼 우리 고유의 의례를 꼼꼼히 챙겨 주는 작품이 나왔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와 소설 <축제>의 차이

또한, 이 <축제>는 감독과 작가가 함께 손을 잡고 영화와 소설을 동시에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소설을 보면 지은이가 감독에게 작품 원고를 써 보내면서 그때마다 영화 제작에 참고할 만한 사항을 덧붙이는 대목이 있다. 특히 <축제>라는 엉뚱한 제목에 대해 작가가 다소 의문을 표명하면서도 감독의 뜻에 따르겠노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제목의 발상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과 영화를 눈여겨보면 둘 다 같은 줄거리를 펼치면서도 두 매체의 상이성만큼이나 그 무게가 다른 것을 살필 수 있다. 소설 <축제>는 모친상을 당한 주인공의 내면 심리와 가족 간의 갈등이 중심 내용을 이루는 데 반해, 영화는 주인공의 내면 의식보다는 떠들썩한 상가 풍경과 장례 의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학생 시절 어머니와 얽힌 ‘눈길’ 이야기, ‘게자루’ 이야기, 그리고 손사랫짓에 관한 이야기가 곡진하게 소개되지만, 영화는 그런 내밀한 아픔을 드러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가 뒤섞여 있다. 하나는 현실의 장례식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의 중간에 수시로 끼어드는 동화이다. 장례식이 이 영화의 외연이라면 동화는 내포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삽입된 동화는 준섭이 지은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를 영상화한 것으로서 인간의 늙음과 죽음에 대한 교훈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왜소해지는 할머니를 보고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할머니는 왜 키가 점점 작아져요?”

아버지는 대답한다.
“그건 할머니가 은지에게 나이와 키를 나눠 주시기 때문이지.”
“그럼 할머니는 왜 점점 정신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것 역시 은지에게 지혜를 나눠 주시느라 그런 거야.”

이렇게 할머니는 당신이 가진 것들을 손녀에게 나눠 주면서 몸집이 점점 작아지고, 마침내 하얀 나비에 영혼이 실려 하늘로 날아간다.

불교적 윤회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 이 동화는 할머니의 헌신적인 내리사랑을 강조하면서, 어버이의 죽음이 결코, 자식과의 단절이 아니며, 앞 세대의 사랑과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다음 세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영화의 주제도 바로 여기에 담겨 있다.

이 이야기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야 하는 데 별로 슬프지가 않아요.”라고 말하는 은지와 같은 아이들에게는 할머니의 늙음과 죽음에 담긴 의미를 일깨워주는 점에서 교육적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치매가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 <축제>

아울러 <축제>는 치매 노인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았다. 노인은 젊은 시절의 치마저고리를 꺼내 입고 홀연히 집을 나서곤 한다. 그때마다 큰며느리 외동댁은 동네 사람까지 동원하여 밤중까지 노인을 찾아다녔다.

시어머니 때문에 오십 줄에 자전거를 배운 외동댁의 고초를 알 만하다. 정신이 없는 노인은 마당의 풋감을 작대기로 다 따버리는가 하면, 담뱃불로 하마터면 집을 태울 뻔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단편적이나마 우리에게 치매 노인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 준다.

구성상으로 볼 때, 이 영화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용순이다. 준섭의 이복 조카로서 초상집에 불쑥 나타난 그는 평면적인 구성으로 인해 자칫 이완되기 쉬운 영화의 줄거리에 짭짤한 소금기를 부여한다. 그는 죽은 준섭의 형이 밖에서 낳아서 데려온 딸이다.

아비가 죽은 뒤 그는 외동댁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살다가 배다른 형제들의 구박에 못 이겨 가출한다. 그때 집안의 돈을 훔쳐 달아났기 때문에 가족들의 감정은 매우 적대적이다. 신문을 통해 할머니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13년 만에 모습을 보인 그는 부엌 일손을 돕는 법도 없이 사사건건 비아냥거리고 다투기를 일삼는다.

끝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마음의 빗장을 풀고 가족들과 융화하는데, 그는 극의 긴장을 이끌어 가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준섭의 작품세계와 개인사에 관심을 두고 상가를 찾아온 장혜림 기자의 역할도 눈에 띈다. 그는 남다른 호기심과 직업적 열정을 가지고 상가에 모인 여러 사람 상대로 취재를 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준섭의 가족사에 대한 정보를 관객에게 알려주는 영화적 장치로 작용한다.

특히 준섭에 대한 용순의 앙금을 씻어주는 데 그의 촉매 역할은 빛난다. 즉 준섭의 소설에 나오는 ‘빗새 이야기’를 용순에게 들려줌으로써 얼어붙었던 마음을 전격적으로 풀게 만드는 것이다.

<축제>는 오늘날 한국인 가족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 준 영화가 아닌가 싶다. 시골 출신으로 어렵사리 도시에서 터를 잡은 아들 세대는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 도리인 줄 알면서도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준섭도 작가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긴 했지만,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지 못하고 시골의 형수에게 의탁해 놓은 형편이었다.

그는 늘 가슴 한구석에 죄책감을 안고 있었으며, 어머니의 영전에 바치는 동화집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는 그러한 마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적 장례 풍습의 재발견

죽음과 장례, 사람은 누구나 이 두 가지 통과의례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죽고, 자식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부모의 상(喪)을 당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시골에 어머니를 두고 있는지라 영화를 주의 깊게 보았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 내가 맞닥뜨려야 할 일이란 것을 생각하니 그 한 장면 한 장면들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느낌은 장례식을 치렀다기보다는 한바탕의 흥겨운 동네잔치를 구경한 듯하다. 눈물 징징거리는 상투성이나 재산 상속을 둘러싼 골육간의 다툼 따위가 없으니 뒷맛이 개운하다. 장례식 영화에 굳이 <축제>란 제목을 붙인 의도가 그러려니와 감독은 이 영화에서 죽은 사람의 모습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특히 이 영화 가운데서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는 식으로 동네 사람들이 조문 온 군수에게 마을 길을 내달라고 건의하는 모습이라든지, 주인공의 서울 동료들이 조문을 빙자하고 시골에 내려와 바다낚시에 열중한다든지, 심심풀이 화투를 치던 문상객들이 돈을 잃자 조의금까지 집어다가 노름에 열을 올리는 모습 등, 인상적이다.

이 밖에도 상두꾼으로 온 늙은이가 술을 따라 주는 용순에게 혹해 결국 만취 상태에서 아들에게 업혀나가는 모습, 삼경(三更) 때 구성진 상엿소리를 뽑던 사람들이 흥이 오르자 “노세, 노세 젊어 노세!”로 돌아서는 대목 따위는 무척 해학적이고 실감나는 장면이다. 이런 부분은 영화가 소설을 압도한다.

임권택은 역시 한국적인 감독이라 하겠다.

그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먹물 옷 입은 승려들의 구도적 삶과 고뇌를 그린 <만다라>(1981)와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봉건사회의 남아선호 유습을 파헤친 <씨받이>(1987), 그리고 흙내음 나는 판소리 가락과 소리꾼의 한을 담아낸 <서편제>(1993) 등을 떠올려 볼 때,

그는 일련의 작품을 통해 꾸준히 우리 민족 고유의 숨결과 흙냄새를 추적해 오고 있으며, 이 <축제> 또한 그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이번 영화에서 우리의 전통 장례 풍습에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댐으로써 새로운 영화 소재를 개발해 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의 활로와 가능성을 한층 더 넓혀 주었다고 하겠다.

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