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영화] 초록물고기

Green Fish, 감독 이창동, 출연 한석규, 심혜진, 문성근, 1997.

무참히 깨어진 소박한 삶의 꿈.

일이 끝나면 한몫 주겠다는 약속이었으나
뜻밖에도 그에게 주어진 것은 태곤의 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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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물고기

막동이, 어린 시절 추억에 잠기다

“큰성, 생각나? 빨간 다리? 빨간색 철교. 우리 어렸을 때 빨간 다리 밑으로 물고기 잡으러 많이 다녔었잖아. 내가 언젠가 초록색 나는 물고기 잡으려다가 슬리퍼 잃어버려서 큰성이랑 영숙이랑 종일 놀지도 못하고 슬리퍼 찾으러 다녔었잖아.”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일을 당하거나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 이처럼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일까. 주인공 막동이는 두목의 지시를 받고 껄끄러운 상대 조폭 두목을 살해한다. 그리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 형에게 옛날을 들먹이며 함께 놀던 때를 이야기한다.

전화기를 부여잡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웃었다 울었다 반복하며 지난 일을 늘어놓는 모습이 처절하고 안쓰럽기 그지없다.

냉혹한 산업사회의 어두운 모습

<소지(燒紙)>와 <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을 쓴 소설가 이창동이 영화감독으로 변신하여 처음 내놓은 <초록물고기>(1997)는 조직폭력배의 세계를 통해 냉혹한 산업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세계는 의리를 앞세우지만, 한낱 허울뿐이고 철저히 이기적이고 돈에 좌우되는 착취와 비정과 배신이 지배한다.

막동이는 군 복무를 마치고 귀가하는 열차에서 우연히 한 여자의 스카프를 습득한다. 그리고 그 주인을 찾아가 유흥업소 가수인 미애를 만난다. 미애는 조폭 두목 배태곤의 여자지만 막동이의 순수함에 마음이 끌린다.

태곤은 처음 막동이에게 주차요원을 맡겼다가 그가 제법 근성이 있는 것을 알고 다른 일을 시킨다. 막동이가 자기 손가락까지 부러뜨려가며 일을 성사시키자 비로소 정식 부하로 인정하고 패거리에 끼워준다.

이때 과거 태곤의 선배였던 김양길이 출소하여 그를 위협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태곤은 막동이로 하여금 김양길을 제거하도록 한다. 일이 끝나면 한몫 주겠다는 약속이었으나 뜻밖에도 그에게 주어진 것은 태곤의 칼이었다.

“막동이 너는 꿈이 뭐냐?”
“가족들이랑 같이 살며 작은 식당 하나 하는 거요.”

순박한 청년 막동이의 비극적인 운명

이 영화는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아보려는 꿈을 가진 순박한 청년이 한밑천 잡아볼까 하고 범죄조직에 들어가 충성을 다하다가 배신을 당해 파멸하는 이야기이다. 막동이의 죽음은 채 피어나기도 전에 강풍에 떨어져 버린 꽃처럼 안타깝다.

한번 일어나보려고 애쓰던 스물여섯 살 청년은 악의 무리에게 이용만 당하고 처참히 희생한다. 단물을 빨아먹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지하세계의 생리를 미처 알지 못했다.

충성을 바쳤던 두목의 칼을 맞은 그가 어둠 속에서 비칠비칠 걸어 나와 차창에 얼굴을 박고 쓰러지는 장면은 자동차 속의 미애가 터뜨리는 오열과 함께 비애감을 증폭시켰다.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묘사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등장인물에 대한 치밀한 성격묘사와 배우들의 사실감 높은 연기이다.

막동이는 순진하기는 하지만 맞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다. 제대군인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여자를 희롱하는 불량배들에게 “왜 가만있는 사람을 괴롭혀요?”하고 대들었다가 두들겨 맞는데, 그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그들이 열차에서 내리자 전역 기념패로 뒤통수를 때려주고 도망친다.

또 나중에 주차요원을 하다가 “야! 이리 와봐. 임마. 너 나 알아 몰라?”하는 판수와 드잡이를 할 때도 잠시 틈을 보이는 순간 각목으로 판수의 머리를 가격한다. 그의 고집스러운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조폭 두목 태곤의 차가운 성격 또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잔뜩 화가 난 그가 부하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차례로 주먹질을 하는 장면이나 서열에 불만을 가진 판수를 무릎 꿇리고 발로 다스리는 장면은 주먹세계의 독특한 질서를 보여준다.

그가 막동이를 어두컴컴한 건물로 데려가서, “옛날에 말이야. 새까만 양아치새끼가 하나 있었어.”라면서 자기가 김밥 훔쳐 먹다 유치장에 갔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김밥집이 어딘지 아냐? 바로 여기야. 그때 김밥 훔쳐 먹은 양아치새끼는 지금 뭐가 되었을 것 같냐? 이 건물 전체 재개발권을 따내서 여기다가 멋진 건물을 지을라고 그러지. 감방 갈 때 이를 박박 갈면서 작심한 게 있었거든.”

불우했던 과거를 딛고 일어나 어떻게든 한몫 잡아 어깨 펴고 살고 싶은 욕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초록물고기
영화 초록물고기 스틸컷

무엇보다 빛나는 것은 신인배우 송강호가 맡은 판수의 역할이다. 조폭 똘마니인 그는 막동이에게 주먹을 휘두른 다음 실실 웃으며 코피 터진 그에게 실실 웃으며 담뱃불을 요구하고 담배 연기를 그의 낯에 뿜어댄다. 그런가 하면, 주차장에서 막동이를 애송이로 얕잡아보고 갖고 놀려다가 머리가 터지기도 하고, 신참 막동이를 치켜 주는 두목에게 불만을 표시했다가 발길질을 당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태곤을 배신하고 김양길의 똘마니가 되어 태곤의 승용차를 박살 내는 데 동참한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관객들이 진짜 조폭을 데려온 것으로 착각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미애 또한 이 영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태곤의 완력에 의해서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처럼 자유롭지 못한 신세지만 내심으로는 순수한 막동이에게 기대고 싶어 한다. 어느 날 막동이와 여행을 가서 하룻밤 함께 보낼 기회가 되었어도 주저하다가 그냥 돌아오는 부분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준다.

나중에 만삭의 몸으로 태곤과 함께 삼계탕을 사 먹는 장면은 막동이의 죽음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만든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보니 큰 버드나무가 서 있는 풍경이 옛날 막동이가 보여준 사진 속의 집이 아닌가. 놀람 끝에 그는 차에 들어가 눈물을 터뜨린다. 마음속에 눌러둔 채 끝내 이루지 못한 비련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의 탁월한 연출

<초록물고기>는 조폭의 세계를 그렸지만, 마냥 치고받으며 세력을 다투는 일반 조폭 영화와는 격이 다르다. 결투 장면은 많지 않지만, 조폭들이 보여주는 강탈과 비열로 점철된 약육강식의 세계가 너무 적나라하고 냉혹하여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밀도 높은 심리 묘사, 사실감 높은 대사와 적절한 배역 등 이창동 감독의 녹록지 않은 역량을 예고한 작품이다.

막동이는 어쩌다 어둠의 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그가 바랐던 것은 어디까지나 가족 간의 따뜻한 정이 흐르는 소박한 세계이다. “넌 꿈이 뭐야?” 하는 태곤의 물음에 “온 가족이 식당이나 하면서 모여 사는 거요.”라고 대답했던 평범하지만, 그의 간절한 소망이 애잔하게 여운으로 남는다.

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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