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영화] 말모이

MALMOE : The Secret Mission, 감독 엄유나, 출연 유해진, 윤계상, 2019.

또 하나의 독립운동, 우리 말 지키기

도시락이든 벤또든
배만 부르면 되지
돈도 아닌 말을 왜 모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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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일제강점기 조선어사전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사전을 만드는 영화라는 소문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전 편찬이란 책상 앞에 모여앉아 줄곧 펜 놀리는 작업인데, 그게 어떻게 영화가 될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순전히 선입견이었다. 충분하게 아름답고 눈물겹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엄유나 감독이 각본까지 쓴 <말모이>(2019)는 제목 그대로 우리 민족이 쓰는 말을 모아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며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일제의 눈을 피해서 하는 일이기에 더욱 의미 있고 비장한 일이다.

류정환이라는 젊은이가 서점 지하에 작업실을 차려 놓고 동지들과 사전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허드렛일할 심부름꾼을 하나 뽑았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언젠가 경성역에서 자기 가방을 훔쳤던 소매치기가 아닌가. 소매치기였던 김판수는 직장을 잃고 중학생 아들의 학비 때문에 류정환의 가방을 훔쳤다가 돌려준 일이 있다.

가방에는 돈 대신 사전 편찬 원고가 가득 들어있었다. 류정환은 그에 대한 반감이 있지만, 낯짝 두꺼운 판수의 넉살과 동지들의 호의에 힘입어 마지못해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 시절 영화] 말모이 1
영화 <말모이> 스틸컷

판수의 글 배우기

그런데 판수는 한글을 모르는 까막눈이다. 더욱이 “도시락이든 벤또든 배만 부르면 되지. 돈도 아닌 말을 왜 모으나?”하고 뇌까리듯 우리말의 중요성과 사전을 만드는 까닭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류정환에게 글자를 배워 거리의 간판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글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아울러 일제의 탄압 속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동지들의 뜻도 이해하게 된다.

조갑윤 선생과 류정환의 고통

나중에 일본의 경찰의 수색으로 그들이 애써 작업한 원고를 모두 압수당한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조갑윤 선생은 잡혀가서 고문 끝에 목숨을 잃는다. 류정환 또한 주모자로 지목되었지만, 친일파 부친이 손을 써주어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고를 빼앗겨 망연자실하던 차에 조갑윤 선생이 만일에 대비하여 집안에 필사해놓은 원고가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일을 재개한다. 이때는 판수도 옛날 교도소의 친구들을 불러 모아 사투리 정리에 힘을 보탠다.

류정환은 겉으로는 친일하는 척하면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일을 계속한다. 밤중에 극장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어휘 수집에 열을 올리는데 결국, 발각되고 만다. 원고 가방을 안고 피하다가 총상을 입자, 판수가 그것을 받아들고 도망친다. 그러나 그 역시 쫓기던 끝에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다행히도 가방을 어느 건물에 가방을 던져놓은 덕분에 원고 가방은 빼앗기지 않았고, 광복되어 출옥한 류정환이 그것을 찾아내어 작업을 마무리한다.

교실에서의 마지막 장면과 유해진의 역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느 초등학교의 교실이다. 이제 교사가 된 판수의 아들이 그의 누이와 함께 류정환이 보내온 ‘우리말 큰사전’을 펼친다. 그 사전은 아버지가 죽음으로 지켜낸 원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책갈피에는 뜻밖에도 아버지의 편지가 끼워져 있다.

옛날 사전 편찬을 돕던 판수가 겨우 익힌 글솜씨로 어린 아들딸을 생각하며 썼다. 남매는 삐뚤삐뚤한 글씨에서 투박스럽지만 뜨거웠던 아버지의 정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는다.

영화 <말모이>는 일자무식의 주인공을 내세워 그가 말과 글의 중요성을 깨달아가면서 의식의 변화를 겪고, 나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성장담’을 담고 있다. 5.18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장훈 감독의 <택시 운전사>의 주인공과 닮은 점이 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단순한 직업의식으로 외국인 기자를 태우고 광주에 갔다가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하면서 비로소 잘못된 시국을 이해하고 투쟁에 동참하는데, 알고 보니 이 <말모이>를 만든 엄유나가 그 영화의 각본을 썼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라고 외치는 류정환 역할의 배우 윤계상은 <범죄도시>에서 보았던 흉악한 조선족 폭력배의 인상이 얼른 지워지지 않으나 이 영화에서는 친일파 아버지와 대립하며 우리말 모으기에 헌신하는 인물로 변신하였다.

외국 유학 갔다가 중도 귀국한 그는 “친일이 아니라 애국이다!”라고 변명하는 아버지를 등진 채 일경의 눈을 피해가며 사전 만들기에 안간힘을 쓴다.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극로(1893~1978) 선생이 실제 모델이라고 한다.

[그 시절 영화] 말모이 2
영화 <말모이> 스틸컷

우리말의 소중함

사실 <말모이>를 끌고 가는 것은 김판수 역할을 한 배우 유해진의 힘이다. 아들딸을 거느린 홀아비로서 밑바닥 삶을 사는 그는 때로는 비굴하기도 하고 뻔뻔스럽고 얄밉게도 행동하지만, 그 나름의 자존심과 고집이 있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있다.

오해를 받거나 무시를 당할 때면 분연히 일어서서 싸울 줄 알고 의로운 일에는 기꺼이 몸을 바칠 줄 안다. 총만 안 들었지 그 또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 영화는 우리말을 주제로 한 작품답게 짬짬이 ‘호떡’이나 ‘민들레’의 말뿌리, ‘엉덩이’와 ‘궁둥이’의 차이 같은 어휘의 정보를 알려주는 잔재미도 지녔다. 우리말에 대한 엄유나 작가의 남다른 애정과 식견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과 글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험난한 시절 선현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진 것임을 깨닫게 해준 점에서 고마운 영화라고 하겠다.

마치며

* 해당 내용은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장병호 영화이야기 [은막의 매혹]에서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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